본문 바로가기
Episode

Les Nabis: 예술을 예언한 화가들

by 0F 2020. 12. 30.

 

모리스 드니 - 세잔 예찬

 

 

 

진중권의 서양 미술사: 모더니즘 편에서 이런 말을 읽었다.

 

야수주의 이후 화면 위의 이미지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인상(im-pression)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표현(ex-pression)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렇다. 야수주의는 인상주의 이후 두각을 드러낸 대표적인 화풍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논지를 전개한다. 

 

 

폴 세뤼지에 - 부적 (고갱의 가르침을 받아 완성한 작품이다.)

 

 

야수주의가 인상주의나 입체주의처럼 뚜렷한 원리와 목적을 가진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야수주의는 그저 후기 인상주의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려는 간헐적인 '실험'에 가까웠다. 

 

그렇다. 야수주의는 거대한 세력의 혜성같은 등장이라기보다는 일정한 특징으로 모이는 작은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룹의 성원들은 굳이 이름을 가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야수주의(Fauvism)라는 명칭은 대중이 전시회에서 받은 충격을 반영한 것일 뿐. 나비파도 마찬가지였다. 반인상주의 화가 그룹이라고 하지만 사실을 인상주의를 이을 또 다른 세대를 가져오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세잔의 사과를 예찬했던 모리스 드니처럼 말이다. 세잔 역시 인상주의를 반대했다기보다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야수주의보다는 앞서 자발적이고 규모 있는 집단을 만든 이들에게는 나비파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그리고 이를 이끌어 나간 대표적인 인물들이 여기에 있다.

 

 

* 글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야수주의는 20세기 초반, 나비파는 19세기 후반으로 시기적으로 나비파가 더 앞선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하지만 본디 더 중요한 것은 두 부류 모두 모더니즘의 본격적인 도약을 위한 지대한 발판이었다는 사실이다.

 

 

Bretons in the Forest of Huelgoat
Le Talisman, l'Aven au Bois d'Amour

 

 

Paul Sérusier (1864-1927)

 

 

본격적으로 모더니즘에 들어가는 초입에 서 있는 화가들은 고갱이나 세잔의 화풍을 따르기 마련이다. 폴 세뤼지에 역시 고갱이 설파하던 종합주의(synthétisme) 이론을 나비파에 설교한다. 나비파를 결성할 시기에 고갱의 가르침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종합주의는 무엇보다 나비파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었다고 볼 수 있는 나비파의 주제는 다양하다. 일본의 목판화를 재현하거나, 응용미술 분야에서 선두적으로 포스터를 만들어 상업의 영역으로 예술을 끌어들이고, 질서가 없어 보이는 상징주의의 흡수까지. 나비파는 가히 현대미술의 예고라고도 할 수 있겠다.

 

 

 

 

Pierre Bonnard (1867-1947)

 

 

'다른 것' 혹은 '외부의 문화' 를 잘 받아들였던 피에르 보나르는 당시 파리 예술계에서 유행했던 자포니즘 사상과 일본 판화 특유의 구도나 색채을 그림에 담았으며 삽화나 포스터 작가로도 기꺼이 나서 예술의 영역을 넓혔다. 순수예술에서 포스터나 그래픽에 손을 댄 화가라고 한다면 작은 거인 툴루즈 로트렉을 떠올리겠지만, 로트렉은 막상 나비파의 공식적인 일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첫 전시회를 함께하며 자주 어울리곤 했다.

 

 

 

 

Édouard Vuillard (1868-1940)

 

 

에두아르 뷔야르는 천과 벽 특유의 장식을 실내 정경을 그림으로써 표현해냈다. 다른 나비파 화가들과 비교하자면 초기의 보나르와 그 양식이 비슷하다. 하지만 여러 시도와 외부로의 발산을 멈추지 않았던 나비파의 행렬에 비하자면 소극적으로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단순해보이지만 자신만의 확실한 특색을 가진 뷔야르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장식성을 만든다.

 

그러한 성향을 가지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뷔야르의 그림에는 종종 그의 어머니나 여동생으로 확인되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뷔야르의 어머니는 그에게 정서적, 경제적으로 대단한 연결고리를 지닌 존재였으며 여동생에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는 모임에서 자신의 뮤즈가 어머니라고 밝히기도 했다. 어머니, 가정에 대한 강한 결속력이 화폭에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Fellix Vallotton (1865-1925)

 

펠릭스 발로통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스위스 출신의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 파리의 예술적 운동에 몸소 참여했다. 그리하여 발로통은 뒤늦게 나비파의 회원으로 활동했지만 그 명성을 드높이는 데 큰 공헌을 한다. 최근 감상자들의 경향에 초점을 두고 보자면 발로통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그리는 예술가이지만, 그보다 넓게 나비파의 다채로운 성격을 지닌다. 역시나 무대 예술, 삽화 등의 응용예술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무엇보다 목판화 연작을 발표하며 당대 큰 호응을 얻었다. 나비파의 한 가지로 정의하기 힘든 예술성을 잘 드러내는 화가인 것이다.

 

 

펠릭스 발로통 - 어린 소녀에게 책 읽어주는 여자

 

 

나비파는 급변하는 세기의 전환기에 선 예술가들의 흡수력과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그룹이라 하고 싶다. 비록 짧은 시기였지만 파리의 예술계에 많은 것을 남기지 않았나.

 

 

 

 

> 폴 세뤼지에 작품 더보기

zone47.com/crotos/?p=1&p170=326606

 

> 나비파의 어원 Nabi는 예언자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