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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인상 그 이후의 표현: 분리파

by 0F 2021. 1. 27.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에밀 놀데- 성령강림절 (오순절)


놀데의 작품을 감상하며 그의 화풍은 어디에 해당할까 고민해 보았는가? 뭉크의 그림을 보며 표현주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클림트와 비슷한 시기 죽음을 맞이했던 동료들이 궁금한가? 자유로운 감상자에게 주어진 의무란 없지만 욕심이 생기는 그 마음을 잘 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루트비히 마이트너 - 묵시론적 도시


"독일인은 정말 이상한 운명을 타고났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깊은 이념과 생각을 찾아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 넣음으로써 쓸데없이 삶을 어렵게 만든다. 그저 과감하게 첫인상에 자신을 떠맡겨라. …… 추상적 관념이나 이념이 없다 해서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괴테의 말이다. 우리는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느낌을 믿으면서도 학문을 익혀야 한다.

뭉크 - 절규


뭉크이다. 처음 표현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작품의 주인이.

당시 표현주의는 폭넓게는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또 인상주의에 대비되는 이후의 화풍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양자 모두 광범위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후자에 가까운 정의가 인정되고 있다. 여기에 포함되는 세부 갈래는 독일의 다리파와 청기사파이다.

에리히 헤켈 - 인형을 가진 소녀


인상주의 이후 그러니까 표현주의서부터의 근대 예술의 영도를 닦은 것은 분리파이다. 다리파, 청기사파 등의 명칭이 다양하지만 결국은 분리파가 원류가 된 것이다.

분리파, 제체시온(Secession). 이들이 발전하는 과정은 분리파의 확장, 축소와 세대 교체를 포함한다. 그 초기 형태는 뮌헨 분리파, 빈 분리파, 베를린 분리파가 산발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후 베를린 분리파는 갈래가 나뉘어 아래의 형태로 번진다. 표현주의라는 화풍을 가진 이들은 그림처럼 그렇게 자유로웠던 것이다.

막스 리베르만 - 반제의 정원


다만 여기서 모든 분리파를 표현주의 화가들의 모임으로 오인하지 않았으면 한다. 표현주의 그리고 분리파가 아방가르드, 전위 예술, 탈피 등의 단어로 정의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령 베를린 분리파는 인상주의 작품이 주를 이뤘다. 분리파는 자신들만의 고유하거나 일정한 예술 양식이나 공통된 형태는 없었지만 함께 신념을 전파한 것이다.

신분리파 포스터


세분화된 베를린 분리파, 즉 베를린 신 분리파는 다리파와 청기사파이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표현주의 혹은 분리파의 집단이다.

다리파 강령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 베를린 거리


드레스덴에서 피어난 다리파(Die Brücke).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되겠다는 포부가 담긴 그룹이다. 신분리파의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베를린에서 드레스덴(작센)으로 옮기며 특유의 온화함을 잃었다. 대표적인 인물 키르히너의 화폭에의 변화는 마치 뒤늦게 참여한 놀데의 작품에서의 섬뜩함을 보는 듯하다.

프란츠 마르크 - 동물들의 운명


뮌헨의 신동맹에서 탈퇴한 칸딘스키가 프란츠 마르크와 창설한 뮌헨의 신미술가협회 이른바 청기사파.

이쯤되면 알겠지만 모더니즘의 시대에 그들 스스로 형성한 화파는 단순히 작품활동을 위해서만이라기보다는 위계와 질서, 타계와 권력 형성의 반복이었다.

파울 클레


베를린의 ‘신분리파’가 별도의 조직이 아니라면, 표현주의 운동의 주축이 된 것은 결국 드레스덴의 다리파와 뮌헨의 청기사파였다. (책의 본문 일부)

잭슨 폴록


1차 대전 후에 표현주의는 명맥이 끊긴다. 다다이즘과 같은 허무에 가까운 예술은 거대한 힘을 형성하기에 부족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주의를 다시 신표현주의로 일으킨 것은 훗날 잭슨 폴록과 같은 추상표현주의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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