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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담

<세계문학에서 가려 뽑은 연시>

by 0F 2021. 1. 13.
키스 반 동겐(Kees van Dongen) - 물랭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Le Moulin de la Galette ou La Mattchiche) 1905-1906


우리는 종종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아서,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상대방에 거부감을 느낀다. 이것은 기대와 실망의 역학관계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에 대해 말 못하는 속으론 그보다 더 어색하고 적응할 수 없음에, 스스로를 견디기보다는 상대방에게 약간의 아니꼬움을 선사한다. 가끔은 그것이 싸움 혹은 알 수 없는 토라짐의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고마움을 전한다. 나와 무척이나 가까운 사람이 내가 예상하던 반경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때, 그 당혹스러움과 실망을 감추기 힘들더라. 스스로의 변화를 강조하고 싶어서 하는 말은 결단코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단지 진심으로 감사의 말임을.
그리고 그러한 편견을 가져보고 또 다시 그것을 깨보고자, 오늘의 시를 읽는다.

•••

당신이 나를 영원케 하셨으니 (R. 타고르)

당신이 나를 영원케 하셨으니, 그것은 당신의 기쁨입니다. 이 연약한 그릇을 당신은 자꾸 비우시고, 또 언제나 싱싱한 삶으로 채우십니다. (중략)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이게 해 주소서.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길을 이리저리 소요할 것입니다.


집은 장미로 가득하리라 (프랑시스 잠)

집은 장미와 꿀벌로 가득하리라.
오후 만찬의 종소리 들리고
투명한 보석 빛깔 포도알이
느린 그늘 아래 햇살을 받으며 잠든 듯 하리라.
아 그곳에서 그대를 마음껏 사랑하리! 나는 그대에게 바치리
온통 스물 네 살의 마음을, 그리고 내 조소적인 정신과
프라이드와 백장미의 나의 시를,
하지만 나는 그대를 알지 못하고,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만일 그대가 살아있다면,
그대가 나처럼 목장속 깊이 있다면,
황금빛 꿀벌아래 웃으며 우리 입맞추리라는 것을
시원한 시냇물가에서, 무성한 잎사귀 아래서,
귀에 들리는건 오직 태양의 열뿐.
그대의 귀엔 개암나무 그늘이 지리라.
그러면 우리는 웃기를 그치고 우리들의 입술을 입맞추리.
말로는 말할 수 없는 우리들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
그리고 나는 발견하리라 그대 입술의 루즈에서
황금빛 포도와 홍장미와 꿀벌의 맛을.


하늘의 융단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금빛 은빛 무늬 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파란, 침침한,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 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오로지 꿈뿐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 드렸으니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산비둘기 (장 콕토)

산비둘기 두 마리가
정겨운 마음으로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다음은
차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졸작 앞에선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오지만, 명작 앞에선 입이 다물어진다. 엮은이가 이 시에 덧붙인 말이다.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을 때 이 시를 마주한 기억이 있다. 일천한 경험에 관계없이 마음에 훅 들어온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랑의 철학 (퍼시 비시 셸리)

보라! 산은 높은 하늘과 입맞추고,
파도는 파도끼리 껴안는다.
누이가 그 오빠를 경멸한다면
꽃다운 누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2연)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조지 고든 바이런)

칼을 쓰면 칼집이 해지고
영혼이 괴로우면 가슴이 허나니
심장도 숨 쉬려면 쉬어야 하고
사랑도 때로는 휴식이 필요하다 (2연)


이별 (기욤 아폴리네르)

내 히드나무의 어린 싹을 꺾었네
가을은 지금 저물고
그대는 가슴에 간직하는가

우리들 다시 이 땅 위에서
또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이니
세월의 향기여, 히드나무의 어린 싹이여

그리고…… 그리고
그대 내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가슴을 파고 간직하여 주시옵기를

- 프랑스 화가 마리 로랑생과의 사랑 그리고 이별, 우리는 아폴리네르를 통해 사랑은 때로 너무나 늦게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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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시를 좋아한다. 최근 들어 여러 문화 차이를 크게 느낀다. 개인적으로 외국 컨텐츠를 많이 접하지만 그들의 유머와 사상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도 많다. 소설을 읽을 때도 그렇다. 허클베리 핀이 짐을 사랑함에도 왜 당당히 노예제폐지론자가 될 수 없었는지에 대해, 알지만 이해하기까지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는 그 간극을 좁혀준다. 엮은이 정시언이 말하듯 사랑은 만국 공통어, 시가 우리를 연결해줄 것이다.



정시언 <세계문학에서 가려 뽑은 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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